호스텔에서 만난 친구와 친해져서 밤에 나폴리 시내로 나가 춤을 추러 가기로 했다. 그 친구 이름은 스테피, 스위스에서 공부를 하고 있는데 태생은 이탈리안이라 이탈리아어를 곧잘 했다. 느즈막히 저녁을 먹고 인원을 더 모아 시내로 걸어갔다. 도착했을 때엔 미친 인파를 마주할 수 있었다. 더운 낮에 들어가 낮잠 자던 사람들이 죄다 밤이 되어 나타난 것처럼 보였다. 진짜 굉장했다. 사실 호스텔 친구들과 함께가 아니었다면 조금 위험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길목 여기저기에서 음악을 크게 틀고 있었고 모든 사람들이 길거리에서 술을 든 채로 춤을 췄다. 나는 코카콜라 한캔을 샀다. 술 끊기로 다짐한 거 끝까지 지켜야지. 일행들과 춤을 추다가 아르헨티나에서 온 남자애와 같이 호스텔로 돌아왔다. 나는 사실 낯선 사람과 단 둘이 남게되면 어색해서 말을 많이 하는 경향이 있다. 괜히 주절주절 말을 늘어놓는 내 손을 그 애가 은근슬쩍 잡으려 했다. 그걸 두번이나 뿌리쳤다. 암쏴리. 너는 누군가랑 만나보고 싶은 생각이 없냐길래 난 그냥 지금 당장 연애할 생각이 없고 지금이 좋아, 라고 대답했다. 최대한 내 기준에선 솔직한 대답이었다. 몇 시간만에 호감을 느끼고 사랑에 빠지는 사람들이 마냥 신기하기만 하다. 그리고 난 이미 오전 12시부터 4시까지 이미 만 삼천 걸음을 걸은 상태였다. 그래서 지금 발이 아작난 듯하다.
스테피와 11시쯤 호스텔을 나서서 항구로 향했다. 우리는 이스키아 섬에 갈 것이다. 이미 유럽인들의 휴가 성지로 알려진 그 곳으로. 2시 5분 배표를 끊고 기다리다가 줄서서 탑승하는데, 갑자기 앞에서 비명소리가 들리더니 누군가가 털썩 쓰러지는 게 보였다. 처음엔 싸움이 난 줄 알았다. 항구에서 보초를 서던 군인들도 한 달음에 그 쪽으로 갔다. 한 여성분이 누워있었는데 한참 동안 의식을 차리지 못했다. 갑자기 기절한 모양이었다. 모든 사람들이 웅성대며 걱정을 했다. 나중에 알고보니 배에 탑승할 때 탑승구에 있는 작은 틈새에 발이 심하게 끼어버렸던 모양이었다. 군인들이 여자분 팔과 다리를 계속해서 주물렀다. 시간이 좀 흐른 뒤에 다시 그분이 의식을 되찾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탑승도 다시 원활하게 이루어졌다. 항상 조심해야 한다.
이스키아행 배는 꽤나 심하게 출렁였는데 그때문인지 많은 사람들의 표정이 시간이 지날 수록 죽을 상으로 변해갔다. 심지어 내 옆에 있던 한 꼬마는 간식거리를 파는 코너 앞에서 모든 걸 게워냈다. 나는 멀미가 전혀 없었기 때문에 다행이라 생각했다.
이스키아에 도착한 후 Porio에 있는 유일한 호스텔에 가기 위해 2번 버스를 탔다. 당일치기를 하려다 가격이 다른 곳에 비해 매우 저렴해 당일 아침에 급하게 예약을 한 곳이다. 스테피는 큰 짐이 두개나 있었기 때문에 내가 대신 버스표를 사러 매표소에 얼른 다녀오려 했는데, 그 사이에 이미 버스는 스테피를 싣고 가버리고 말았다. 나중에 호스텔에 도착했을 때 마침 호스트가 스테피를 픽업해와서 딱 만날 수 있었다. 잠깐 떨어져있었다고 그게 또 반가웠다. 그리고 호스텔을 막 들어서는 K언니도 만날 수 있었다.
짐을 풀고 잠깐 밖을 둘러봤다. 그리고 다음날 수영을 하기 위해 비키니를 사러 갔다. 비키니 가게 주인은 중년 남성이었는데 내게 여러 사이즈의 비키니를 가져다 줄 때마다 뜨거운 콧김을 내 어깨에 내뿜었다. 심지어 본인이 입혀주려 했다. 그때부터 기분이 더러워서 그냥 나중에 다시 오겠다고 하고 나가려고 했다. 그런데 나한테 좀 더 너를 보고 싶다느니, 왓츠앱이 있냐느니 등의 말을 하는 거다. No! 하고 빨리 나와버렸다.
오후 8시 반에 호스텔 라운지에 모여서 다 함께 저녁을 먹으러 갔다. 호스텔에 숙박하는 열두 명이 조그만 봉고차에 우겨넣어져 다들 뭉개진 채로 레스토랑으로 향했다. 호스텔 주인의 가족이 운영하는 식당이라나. 난 홍합 요리를 먹었는데 꽤나 괜찮았다. 10유로를 넘지 않은 가격이기도 했고. 하지만 이탈리아답게 요리는 9시 반이 되어서야 나왔고 호스텔에 도착하니 12시였다.
슈퍼마켓에 치즈와 햄을 파는 코너가 있는데 진열된 빵을 가져가서 샌드위치를 해달라고 하면 치즈와 햄을 그 자리에서 슬라이스해 즉석 샌드위치를 만들어준다. 조식으로 샌드위치를 먹고 오늘은 그냥 해변으로 가서 수영을 하기로 했다. 한참 걷다가 괜찮은 해변가를 발견했다.
오늘은 파도가 너무 높아서 제대로 된 수영을 하지 못했다. 아마 어제 비가 온 영향이 있었을 것이다. 근데 이지는 초반에 주저하다가 나중에 곧잘 수영을 하더라. 스테피와 K언니, 나는 그냥 대충 물을 묻히고 선탠을 주로 했다. 수영을 도전해보긴 했는데 물만 엄청 먹고 나왔다. 발이 땅에 닿지 않으면 너무 무섭다. 그렇게 선탠을 하다 깜빡 잠이 들기도 했다. 그 여유로움이 너무 좋았다. 늦은 오후엔 아란치니를 먹었다. 아란치니는 어디에서 먹어도 맛있어.
호스텔로 돌아와서 씻고 잠깐 휴식을 취한 뒤 일몰을 보려고 나왔다. 높은 돌담 위에 올라 앉아 일몰을 봤다. 석양이 한 가운데에서 지고 있었다.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벅차면서도 허전한 모순된 감정이 차올랐다. 울고 싶기도, 울고 싶지 않기도 했다. 붙잡고 싶은 시간이 어디 한두 번 뿐이었겠나, 하지만 이렇게 보내고 싶지 않은 순간도 없었다. 붉게 타오르던 바다는 이내 어둑어둑해졌다. 나는 이 일몰을 죽을 때까지 기억하겠노라 다짐했다. 내가 만약 기억을 잃게 되는 날이 오더라도, 그 전날까지는 이 일몰을 떠올릴 수 있게.
한참을 바라보다 내려와서 야시장을 구경했다. 카페에 앉아있을 때 스테피와 이지도 합류했다. 간단한 간식을 먹은 뒤 여기저기를 돌아다녔는데, 아이들 전용 오락실에 들어가니 풀장 위에 작은 보트가 떠 있었다. 이지가 그걸 타고 싶다했고, 우리는 두팀으로 나뉘어 보트에 탑승해서 범퍼카를 타듯이 서로의 보트를 튕겨내며 놀았다. 오랜만에 미친듯이 웃었고 우리를 지켜보던 사람들도 웃었다. 내가 올 한해 들어 이렇게까지 웃어본 적이 있었나. 마지막으론 일몰을 봤던 돌담 위에 다시 올라가 별들을 바라봤다. 별자리를 찾아보는 건 만국 공통인가 보다. 별을 쳐다보며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 나는 무려 별똥별을 보기도 했다. 문득 추워져 우리는 호스텔로 돌아왔다.
다음날 이스키아 항구 근처 해변에 가서 수영을 했다. 마지막 날은 왜 항상 이렇게 시간이 빨리 갈까. 이스키아의 명물이라는 토끼고기를 먹어보고 싶었는데 아쉬웠다. 아직 핫스프링도 못 가보고 전기 자전거도 못 타봤는데. 하지만 역시 수영은 재밌었다. 호스텔로 돌아와 씻고 스테피를 다시 만나서 작별 인사를 했다. 그녀 눈에 약간 눈물이 고인 거 같아서 나도 뭉클했다.
7시 40분 출발 배인데 버스가 늦게 와서 7시 35분이 되어서야 이스키아 항구에 도착했다. K언니는 자기가 원래 감이 좋은 사람인데, 내가 배를 탈 수 있을 거라고 했다.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언니가 신경쓰지 말고 뛰라고 하기에 배를 향해 뛰기 시작했다. 너무 힘들어서 뛰다 잠시 걷고 있자니 뒤에서 뛰어 뛰어! 하는 K언니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다시 있는 힘껏 달렸다. 마침 내 앞의 사람도 택시에서 짐을 내려 배에 옮기고 있는 중이었으므로 제일 마지막으로 배에 탑승할 수 있었다. 숨이 턱끝까지 차올랐지만 언니와 손인사라도 할까 싶어 선미로 올라갔다. 내려다보고 있던 사람들이 "You're the last last"라며 웃어보였다. 머쓱했다. 어쨌건 언니를 찾아보는데 아무리 두리번 거려도 보이지 않았다. 배가 출발하고 점점 항구가 멀어져가는데 언니를 볼 수 없었다. 마지막 인사라도 했으면 좋았을 것을. 아쉬움에 울컥 눈물이 나왔다.
나폴리에서의 마지막 음식도 Tripperia O'Russ Napoli 식당에서 먹었다. 이틀 전 이곳을 방문했던 나를 기억하셨는지, 아저씨께서 먼젓번 마셨던 똑같은 음료수를 서빙해주셨다. 또 역시나 무뚝뚝한 표정으로. 이번엔 스튜인 Zuppa Di Soffritto를 주문했다. 걸쭉하고 매콤한 토마토와 파프리카 맛 스튜 안에 소 내장이 들어있다. 빵과 함께 깨끗하게 먹어치웠다.
음식을 다 먹고 택시를 불러 공항으로 갔다. 공항까지 가는 길이 잔뜩 밀려 요금 미터기가 자꾸만 올라갔다. 기사 아저씨가 미안한듯 원래는 10분이 안 걸리는 거리인데 오늘따라 교통 체증이 있는 거라고 말씀하셨다. 나는 그에게 15유로를 쥐어주고 잔돈은 괜찮다며 내렸다. 짐을 모두 챙겨 공항에 서 있는데, 모든 것이 꿈처럼 지나간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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