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독일 살이/행정 업무

[움멜둥/Ummeldung] 새 동네에서의 이야기

 이사 오기 전에 친구가 준 라면 포트를 받아왔는데 이거 정말 물건이다. 라면 물이 거의 30초 만에 끓는 것 같다. 게다가 젓가락만 있으면 방에서 간편하게 후루룩 끓여 먹을 수 있다니. 라면 포트 개발자분 많이 버시고 오래 사십시오. 

 

 라면은 Korea Markt에서 샀다. 그런데 전 동네보다 한 봉지에 몇십 센트 정도 비싸다. 아무래도 인터넷에서 대량으로 쟁여놔야 할 것 같다. 다른 건 몰라도 라면은 쟁여놔야 마음이 든든하다. 그렇지만 한 달에 두세 번 먹을 정도로, 자주 먹는 편은 아니다. 어쩌다 춥고 지칠 때 라면 한 그릇을 먹으면 금방 원기가 회복되는 느낌이다(?). 건강에 좋지 않겠지만 해외에서 사는 나에게 라면은 소울 푸드. 

 

 

 

 

 

 이사를 오고 나서 갑작스레 새로운 사람들과 장소들을 많이 만날 기회가 있었다. 그중에서도 재료 손질을 도우면 공짜로 요리를 먹을 수 있는 장소가 있다. 거의 남는 것 없이 음식과 맥주를 팔면서 가게를 운영하는 곳이다. 가끔 사진 전시를 하기도 한다. 음식은 3유로 또는 그 이상 자유롭게 내고 먹을 수 있으며, 맥주는 1유로에 판매한다. 

 

 목요일에는 나도 처음으로 그곳을 방문에 재료 손질을 도왔다. 사실 도왔다고 하기에는 터무니없이 적은 양을 했을 뿐이지만... 양파와 가지를 써는 것뿐이었는데 한 끼를 든든하게 먹을 수 있었다. 요리사도 그때그때 바뀌며 자원봉사의 일환처럼 임금을 받지 않고 요리를 한다. 

 

 어제는 중심가에 갔다 오느라 요리를 돕진 않았지만 정말 맛있는 커리를 먹었다. 사람도 많이 없어서 두 접시를 먹을 수 있었다. 목요일에도 콩커리를 먹긴 했는데 이 커리와는 비교할 수 없는 맛이다. 단출해 보이고 비건 메뉴라 어떤 육류도 들어가지 않았는데도 정말 맛있었다. 요리사에게 메뉴명과 레시피를 물어보고 싶었는데 그냥 바보같이 "Das ist sehr lecker!" 하고 돌아왔다. 저 으깬 땅콩이 화룡정점. 이 메뉴 꽤 자주 만든다고 하니 다음에는 꼭 레시피를 물어봐야겠다. 

 

 

 

 

 독일어 공부도 될 것 같은 게, 여기서 만난 친구는 내게 독일어 공부를 시켜주겠다는 의지로 독일어로 말을 건네곤 한다. 까먹어 가던 기초 단어들을 다시 반복할 수 있으니 좋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런 환경에 노출되어야 스피킹이 늘 것 같다. 독일어로 서로 대화하는 것을 들으니 충분히 내용을 이해할 수 있는데도 그에 대한 내 의견을 말하기가 어려웠다. 문장을 구성하는 것부터 천천히 연습해봐야지.   

 

 

 

 가지의 맛을 뒤늦게 알아버렸다. 목요일날 먹었던 콩커리에 가지도 들어가 있었는데 의외로 달짝지근하게 맛있어서 놀랐다. 다음날 장을 볼 때 바로 가지 픽. 소금도 뿌리지 않았고 아무 양념 없이 굽기만 했는데도 맛있었다. 다음에는 가지 파스타를 해 먹어 봐야겠다. 

 

 

 

 

 

 과자를 쌓아놓고 오랜만에 <블랙 스완>을 재탕했다. 나는 영화를 두고두고 반복해 보는 걸 좋아한다. 놓쳤던 부분을 발견하기도 하고, 좋은 영화는 다시 볼수록 사골 국물이 우러나는 것처럼 감동이 더해지기 때문이다.

 

 이번에는 연기에 집중해서 영화를 봤다. 역시나 나탈리 포트만의 연기가 좋았다. 이 영화로 여우주연상을 받을만했구나 납득이 가는 연기였다. 니나가 흑화하기 전의 조심스러운 성격을 나타내는 발성이 신기하고도 놀라웠다. 시간이 지나갈수록 광기가 덧입혀지는 표현을 탁월하게 해냈다.

 

 뱅상 카셀도 영화 안에서 실제 연출가 같은 자연스러운 연기를 보였다. 처음 뱅상 카셀을 알게 된 건 제이슨 본 시리즈에서 비밀 요원으로 나왔을 때였고, 그 후 돌이킬 수 없는(Irreversible)이라는 영화에서도 그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맡은 역마다 확연히 다른 모습으로 녹아드는 걸 보면 배우는 괜히 배우가 아니다.

 

 

칩스는 역시 Gesalzen 맛이 최고다. 

 


 

 오늘은 움멜둥(Ummeldung)을 하러 Rathaus에 갔다. 이사를 해서 주소가 바뀐다면 2주 안에 움멜둥을 해야 한다. 전입 신고나 마찬가지다. 원래 목요일에 테어민을 잡아놨었는데, 이 도시는 굳이 테어민 없이도 바로 움멜둥을 할 수 있다고 들었다.

 

 집 계약서를 프린트해야 하는데 카우프란트에서는 usb 프린트가 안되고, 주변 copy shop들은 오후 1시에야 열길래 카페에서 시간을 때웠다. Zum mit hier?로 잘못 알아듣고 맞다고 대답했는데 테이크 아웃 잔을 꺼내길래 여기서 마실 거라고 황급하게 바꿔 말했다. 다시 기억을 더듬어보자면, zum mitnehmen이 아닌 zum mit ihnnn? 처럼 들려서 헷갈렸다. 아마 아직 귀가 안 트인 모양이다. 

 

 

 라떼와 컵케이크는 예뻤지만 특별한 맛은 없었다. 아무튼 책을 읽으며 시간을 보내다가 서류를 뽑고 Rathaus로 갔다. 번호표를 받고 대기하다가 순서가 되어 베암터에게 갔다. 여권, 신분증(Ausweis), 그리고 집주인에게서 받은 Bestätigung 또는 집 계약서를 제출하면 된다. 

  

 독일의 공무원 격인 베암터들에게 친절을 바라면 안 된다. 악명은 자자하지만 전에 살던 도시들의 베암터들은 친절했고 모두 영어를 잘했다. 하지만 내가 오늘 만난 베암터는... 음.. 처음부터 골이 나있는 표정이었다. 서류 처리하는 데 조금 시간이 걸렸고, 그가 다시 서류들을 돌려주길래 나는 당연히 모두 처리가 되었는 줄 알았다. 그래서 테어민 종이를 내밀며 이 테어민을 취소할 수 있냐고 물었는데 그가 대뜸 한심하단 표정을 지으며 아인. 모먼트. 하고 짜증을 꾹꾹 눌러 담아 말했다. 

 

 

 

 이보다 더한 일들을 전부터 많이 겪었는데도 불구하고, 멸시하는 태도를 보니까 왠지 울컥했다. 표정 관리도 안되고 괜히 눈물이 날 것 같았는데 참았다. 내가 그러고 있으니 베암터도 흘깃거리며 내 눈치를 봤다. 서류 처리가 끝나자 다 끝났다며 괜히 부드럽게 얘기하는데 별로 위로가 되지 않았다. Startpaket과 Meldebestätigung을 받아 들고 대기실 밖에 나오자마자 눈물이 터져서 한참을 의자에 앉아 있어야 했다. 머리로는 '뭐야 이건 아무것도 아닌데, 이보다 더한 일 많이 겪었잖아' 하는 생각이 드는데도 서러워서 울었다. 글로 적으니 정확히 그 상황을 전달하기 어렵지만 pissed off라는 단어만 떠오른 걸 보면, 속된 말로 그가 내게 꼽을 줬다고 할밖에.

 

 이 베암터들은 자국민들한테도 똑같이 대하기 때문에 뭐 그러려니 넘겨야 한다. 나도 울고 나서는 한결 기분이 나아져서 씩씩하게 거리를 걸었다. 그리고 사실 울 일도 아니었기 때문에 나도 이런 감정이 혼란스러웠다. 그동안 약간 쌓인 게 있었나.

 예를 들어, 내가 어떤 사람에게 서류 처리에 관해 물었는데 그게 그 사람의 업무가 아니라고 하자. 그럼 한국의 경우, 이 일은 내 소관이 아니며 이러이러한 곳에 가서 물어보아라 하고 말할 것이다. 아니면 그냥 모른다고 대답하거나. 여기에서 만약 똑같은 질문을 하게 되면 인상을 팍 찌푸리며 Nein! 하고 돌아서는 사람이 있다. 이곳이 독일이다.  

 

 맨날 '나도 똑같이 대해줘야지!' 생각은 하지만 나는 누구에게도 '꼽주는' 사람이 못된다. 내 기분을 남들에게 그대로 전가시키는 것도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하고. 하지만 세상은 넓고 인간은 많으니 내 상식에 어긋나는 사람들도 있기 마련이다. 그리고 그런 감정을 오래 담아두고 있어 봤자 좋을 게 없다. 독일에 살면서 배운 게 있다면 부정적인 일을 금방 훌훌 털어버리는 법이다. 

 

 

 

 

 전 동네에서 만든 슈페어콘토를 해지해야 해서 Meldebestätigung 복사본과 Sparbuch를 은행에 보냈다. 말일이 다가오고 있으니 얼른 해지되어야 할 텐데. 이제 Sparkasse에서는 슈페어콘토 개설이 안된다고 한다. 아마 작년부터 규정이 바뀐 걸로 알고 있다. 다른 유학생들 얘기를 들어보니 엑스파트리오로 슈페어콘토를 개설한다고 하는데, 나도 문의해보고 새로 만들어야 할 것 같다. 

 

 

 

 

 집에 와서 라자냐를 오븐에 데워 먹고 웰컴 키트나 다름없는 Startpacket을 펼쳐봤다. 나름 괜찮은 굿샤인이나 쿠폰들이 많았다. 데엠 쿠폰은 항상 가지고 다녀야지. 5월 안에 다 써버릴 계획이다. 미디어막트 쿠폰은 50유로 짜린데 사실 이게 말이 되는 건지 잘 모르겠다. 설명을 보니 따로 제한이나 조건이 있진 않은 것 같은데, 50유로 쿠폰을 그냥 준다고...? 나중에 가서 쓸 수 있는 건지 물어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