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첫 출근을 했다. 벌써 네 번째로 하는 연구소 인턴이다. 처음은 석사 입학하기 전에 한국에서 해봤고, 두 번째와 세 번째는 학위 과정에서 반드시 수료해야 하는 mandatory internship, 그리고 이번은 논문을 쓰기 전에 과정을 익히기 위한 voluntary internship이다. 슈퍼바이저들이 인턴을 먼저 해보는 게 어떻겠냐고 권했다. 인턴을 하는 동안 data collecting도 하고 시간 압박 없이 이것저것 배워보라며. 나야 안좋을 게 없지만, 이번이 내 인생 마지막 인턴이길.
자전거를 타고 가려 했는데 아침부터 비도 오고, 초행길이었기 때문에 그냥 우산을 쓰고 걸어가기로 했다. 무려 40분이 걸리는 거리ㅋㅋ였지만 넉넉하게 나와서 괜찮았다. 연구소 건물에 도착해서 리셉션 의자에 앉아 슈퍼바이저를 기다리는 동안 가슴이 두근댔다. 정말 오게 될 곳일 줄 몰랐는데 결국은 왔다. 꿈의 연구소라고 예전부터 사방팔방 말하고 다녔는데 (그때 당시도 터무니없는 말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정말 오게 되다니.
사실 언제부터 이곳에 그렇게 오고 싶어 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결국 내 선택이었다. 반신반의하면서 컨택을 했고 생각보다 매우 의외로 그들이 나를 환대했다. 타이밍을 잘 맞췄던 건지 뭔지. 어쨌든 이러저러한 생각들 때문에 들뜬 마음이 쉬이 가라앉지 않았다.
내 슈퍼바이저가 될 N이 리셉션으로 내려왔고, 우리는 처음으로 악수하며 소개를 했다. 물론 스카이프 미팅을 하면서 두 번 정도 얼굴을 보긴 했는데 실물과는 엄청난 차이가 있었다. 나는 왜 스카이프 미팅할 때 그가 중동계일 거라고 생각했을까... 그는 sightseeing을 잠깐 시켜주고 서류 처리도 도와주었다. 서류 처리라고 해봤자 이곳저곳 돌아다니며 사인을 받는 것이었지만. 아직 정식 카드가 나오지 않아 게스트 카드를 받았다. 카드를 갖다 대야 문들이 열린다. 여기까진 여느 연구소들과 다를 게 없다. 가끔가다 자동으로 열리는 문도 있는데, 세팅이 랜덤으로 되어있어 어떤 문고리는 예상치 못하게 혼자 열리곤 했다. N도 처음엔 꽤 혼란스러웠다고. 또 건물 자체가 둥글게 이어져있는 형태라, 길치인 나에겐 정말...
함께 미팅했던 K도 합류해서 셋이서 커피 타임을 가졌다. 그들은 데이터를 수집하고 post processing을 병행하는 단계에 있다. 내일은 피험자를 통해 데이터를 수집하는 과정을 참관하기로 했다. 대신 오늘은 새로 만들어진 내 계정에 여러 프로그램을 설치하고 실행해봤다. 모든 세팅이 Linux로 되어있어서 정말 낯설었다. terminal로 command 작성을 해서 다른 프로그램을 불러와야 하고. 그것 외에도 K가 연구 방향에 대해 1:1 과외 수준으로 몇 시간 동안 설명을 해줬는데, 하루만에 너무 많은 걸 머리에 욱여넣어서 그런지 지끈지끈 두통이 오기도 했다. 결과가 어떻게 나올지 너무 익사이팅하다며 미소 짓는 그를 보며, 역시 과학자는 아무나 하는 게 아니야... 라는 생각을 다시금 하게 됐다. 그래도 다행인 건 N과 K가 진심으로 친절하게 대해주는 게 느껴진다는 것이다. 이 얼마 만에 느껴보는 독일인의 정(?)인가.
점심을 먹을 때는 정말 기함을 했다. 뭔 베지 수프가 4.80유로나 하는지. 내일부터는 카페테리아에서 점심을 먹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지만, 음 또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 다 같이 점심 먹자고 하는데 혼자 빠지기도 뭐하고. 독일에 사시는 한국분이 첫 출근에 관해 조언을 해주셨었는데, 독일인들은 새로 들어온 사람에게 신경을 안 쓰는 편이라 (팀원으로 여겨지려면 일년이 걸린다고) 혼자 점심을 먹게 될 가능성이 높다고 한 것이었다. 사실 나는 혼밥을 잘하는 편이라 혼자 밥먹는 것쯤은 아무렇지도 않아서 별로 걱정은 안했는데, 먼저 점심 먹으러 가자고 제안하길래 그거에 더 놀랬다. 뭐 생각해보면 일년 전에 인턴했던 곳에서도 같이 점심을 먹긴 했는데. 아무래도 일반 회사랑 연구 분야 쪽은 다른가? 점심을 먹으면서 K가 다른 부서의 사람에게도 나를 소개했다. 그 중 한명이 내가 전에 있었던 지역과 가까운 곳에서 대학을 나왔다고 하길래 어디냐고 물어보니까 예전에 어드미션을 받은 곳 중 하나였다. 나 그 학교의 XXX과 갈 뻔 했는데, 라고 말하니 본인이 그 과를 졸업했다고. 세상 참 좁았다. 아무튼 그 맛없는 수프를 먹으며 사람들과 이야기를 했는데, K는 점심을 먹을 때도 연구 얘기를 했다. 밥맛 떨어지게 왠 일 얘기냐 했던 나도 점점 귀를 기울이게 될 정도로 나름 재밌는 내용이었다.
K 먼저 퇴근하고 나는 리눅스 운영 체제에 익숙해지기 위해 이것저것 더 만져보다가 퇴근했다. 무슨 명령어가 이렇게 많고 복잡한 건지. 집에 와서 슈퍼바이저가 쓴 논문을 읽어보려고 했는데, 친구에게 연락이 와서 같이 저녁을 먹었다. 씻고 잠깐 글을 쓰다보니 벌써 잘 시간이다. 아 진작에 논문 통독을 했어야 했는데 내가 게을렀다. 물론 K는 걱정 말라고, 어차피 계속 반복할 거니까 익숙해진다고, 서두르지 말라고 했지만 난 정말정말 반복을 많이 해야만 이해를 하는 사람이라서 걱정이 될 수밖에. 일단 연구자들은 기억력 좋은 것도 한 몫 하는 것 같다. 나도 술 끊은지 좀 됐으니 뭔가 차도가 있어야 하지 않나 싶지만, 아쉽게도 내 뇌는 plasticity를 보이지 않는다.
+ 잠을 청하려고 누웠는데 오른쪽 귀에서 이명이 들린다. 저번에 난청이 의심된 이후로 헤드셋이나 이어폰을 일절 끼지 않았는데ㅠㅠ 뭐가 문제인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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