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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그때 쓰는 일기

갑자기 순례길과 트레킹이 가고 싶은 사람의 일기

 나는 걷는 걸 좋아하는 동시에 나가는 걸 매우 싫어하는 모순적인 집순이이다. 독일에 오고 나서 그 증세는 더 심각해졌다. 일단 나가면 다 해결하기 위해 은행 - 마트 - 우체국 등 동선을 미리 정해놓고 외출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사 온 뒤로부터 시매스터 티켓을 사용하지 못해 졸지에 반 강제적(?)으로 뚜벅이가 되어버린 나. 그리고 인턴십을 시작하면서 나의 걷기 인생 새로이 다시 시작되었는데... 

 

 

 

 하루에 왕복 두 시간을 걷는 셈이다. 심지어 화요일은 자전거 고장이 난 날이어서 출근길에 트램을 탔었기 때문에 성적이 저조한 것이다. 누군가는 그 2.70 유로 때문에 궁상떤다 하겠지만, 만약 트램을 타며 출퇴근을 한다 하면 하루에 2.70 x 2 = 5.40 유로, 일주일에 무려 5.40 x 5 = 27유로가 들게 된다.

 물론 모나츠 카르테를 사는 방법도 있지만 여전히 비싸지 않은가. 차라리 걷고 그 돈으로 뭔가를 소비하겠어! 출근도 넉넉하게 9시까지 하면 되기 때문에 잠이 모자랄 일도 없다. 처음엔 이거 시간 낭비 아닌가 싶었는데, 혼자만의 페이스로 걷는 시간을 가질 수 있다는 건 생각보다 활기가 도는 일이었다. 

 

 

 

 그렇게 걸어 다니는 시간이 생기다 보니 한동안 잊고 살던 '걷기'와 관련된 기억이 떠오르곤 했다.

 

 

 십 대 때는 등산을 지독히도 싫어했다. 우리 가족은 신년이 되면 첫날 해돋이를 보기 위해 뒷산을 오르곤 했다. 아니 바로 앞에 바다가 있는데 바다를 가잖고... 아무튼 그 이른 새벽에 억지로 산을 타다가 헛구역질을 하기 일쑤였다. 하긴 잠도 제대로 못 잤는데 해 뜨는 걸 보자고 서둘러 움직이다 보니 몸이 거부 반응을 보일 만도 했다. 그 뒤로도 시간에 쫓기는 등산은 정말 x100 싫어한다. 

 

 

 갓 스무 살 여름에 국토 대장정을 완주한 적이 있다. 물론 걷는 걸 좋아해서 신청한 거였지만, 비가 오나 살벌한 더위에 해가 내려쬐나 고난의 행군을 해야 하는 건 일반적으로 '걷는 걸 좋아하는' 사람에게 꽤 힘든 일이었다. 좋은 등산화를 신었어도 발에 물집이 잡혔고 매일같이 빨래를 했지만 결코 빠지지 않던 땀 냄새. 아무리 경보로 걸어도 집단 자체의 발걸음이 빨라 따라잡을 수 없어 힘들게 행군해야 했던 그 무덥고 끈적끈적한 여름이 생각났다. 하지만 마지막 날에 고성 통일 전망대에서 내려다본 풍경은 아직도 생생하다. 

 국토 대장정을 끝내고 얻은 건 나도 무언가를 끝낼 수 있구나 하는 자신감이었다. 그 전의 나는 일을 벌여놓고 뒷마무리는 깔끔하게 하지 못하는 성격이었는데, 나 자신조차 만족스러워하는 결과를 처음으로 얻게 된 것이었다. 이때 얻은 경험은 무언가에 도전해야 할 때 '저거라고 못할까'라는 생각을 하도록 도와준다. 

 

국토 대장정 착장 - 팔토시와 몸빼 바지는 기본 아닌가요?

 

 그 뒤로부터 언제부턴가 순례길 또는 트레킹에 대한 로망이 생겼다. 그때 예전처럼 멀고 먼 목적지를 정해두고 하염없이 걷고 싶을 때가 있다. 해외에 나가본 경험도 없던 학부 시절에는 산티아고 순례길이 너무 가고 싶어서 정보 수집을 하고, 알바를 하며 ppt를 만들기도 했다. 독일에 가기로 결심하고서 ppt는 무용지물이 되었지만.

 지금도 이 로망은 유효하다. 혼자나 셋보단 둘이서 걷는 게 좋을 것 같다. 어쩌다 신혼부부들이 신혼여행 대신 순례길을 걷는다는 기사들도 눈에 띄어 읽어본 적도 있는데 정말 멋진 일인 것 같다. 말 그대로 긴 여정을 입체화해서 <맛보기>하는 거니까. 언젠가 나도 평생을 함께하고 싶은 사람이 생긴다면 넌지시 산티아고 순례길을 함께 가보지 않겠냐고 제안하고 싶다. 

 

 

 여행을 다니다 보면 큰 배낭을 짊어지고 다니는 백패커들을 보게 된다. 나는 그들에게서 아이슬란드와 노르웨이로 트레킹을 다녀왔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사실 그들이 찍은 멋지고 아슬아슬한 사진을 봐도 별 감흥이 없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트레킹에 꽂혀 쉐락볼튼(kjeragbolten)이라는 곳을 검색해봤다.

 

출처: https://www.fjordnorway.com/top-attractions/preikestolen/kjerag

 

 

 

 

 (New!) 버킷리스트에 추가되었습니다. 

 

 


 

 +) 구글 창에 kjeragbolten까지만 쳐도 자동 완성으로 kjeragbolten death라는 무시무시한 키워드가 뜬다. 근데 다들 궁금해할 만하기도 한 게, 사진만 봐도 손에서 땀이 나는데 바위에서 발이 미끄러질 수 있는 거잖아. 

 

 

 하지만 가장 최근 답변인 2019년 7월까지 아직 바위에서 떨어진 사상 사고는 없다고 하니 다행인 일이다. 아무래도 나 같은 고소공포증 인간은 저기까지 가서 사진 안 찍겠다고 난리 치다가 다리 덜덜 떨면서 바위 위에 앉을 것 같은 이 낯설면서도 익숙한 느낌적인 느낌... (김칫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