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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그때 쓰는 일기

기록 01

 오전 8시와 오후 4시에 각각 실험이 있었다. 밤낮이 바뀌어있던 나였기 때문에 전날 아예 밤을 통째로 새고 실험실에 갔다. 그전에 배가 고파서 조심스럽게 부스럭부스럭 부엌에서 요리를 해먹었다. 새벽에 불닭 소스를 넣은 면을 먹어서 그랬는지 하루종일 배가 아팠다. 일주일만에 실험실로 가는 길은 추웠다. 요즘은 해가 오후 네다섯시 정도가 되면 져서 엄청나게 깜깜해진다. 이제 진짜 겨울이구나 싶었다. 

 

 저번 주엔 컴퓨터가 오작동해서 실험 직전에 피험자에게 취소 통보를 해야만 했다. 심지어 피험자는 연구소에 막 도착한 상태였다. 참 평탄하지 않다. 한달 전쯤에도 post processing이 제대로 되지 않아 N이 힘들어하는 모습을 봤었는데 그날도 그는 머리를 싸매고 한참을 고민하다 한숨을 내쉬며 나에게 미안하다고 했다. 나한테 미안할 필요는 없는데 그 모습을 보자니 속이 상해서 그날 집으로 돌아가 술을 엄청나게 퍼마셨다. 당연하게도 바로 다음날 실험도 취소가 되었다. 

 

 실험실을 들어서자 N이 세팅을 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이른 아침이어서 우리 둘다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다. 도착하자마자 amplifier를 켜고 이것저것 세팅을 도왔다. 저번엔 말썽이었던 컴퓨터는 새 것으로 바뀌어 있었다. 귀마개, 휴지, electrodes 등등을 챙겨 피험자가 앉을 의자 앞에 놓아두었다. 아침에 실험이 있는 날이면 꼭 N이 커피를 내려온다. 우리는 커피를 마시며 나머지 작업을 했다. N이 미국 대선 소식에 대해 물었다. 아직 결과가 나오지 않았기 때문에 어떻게 될까, 너는 어떤 후보가 나을 것 같아? 그런 얘기를 했다. 당연히 바이든이지, N이 말하고 우린 같이 웃었다. 그는 또 독일이 partial lockdown 된 건 아냐고 물었다. 안다고 대답했다. 그 말을 들으니 다시금 살짝 울적해졌다.

 

 실험 준비는 나쁘지 않게 흘러갔다. 나는 피험자에게 전극을 붙이고 registration, navigating을 했다. 첫 registration은 제대로 되지 않아 두세번 반복해야 했지만 나중엔 한번만에 제대로 끝낼 수 있었다. 이게 온전히 나만의 실험은 아니지만 그래도 논문에 들어가는 실험이기 때문에 대부분의 준비와 실행은 내가 했다. 코일은 1.6~2키로 정도의 무게라서 그걸 특정 방향으로 5분 정도만 들어도 팔이 떨어질 것 같다. 그걸 30분 동안 들었던 생각을 하면 끔찍하다. 다행히도 이번 실험은 기구를 이용해 코일을 고정하기 때문에 굳이 내가 들고 있을 필요가 없다. 원래는 세명 정도가 함께 실험에 참여하는데 아마 K는 바쁜 모양이었다.

 

 실험이 끝나고 점심을 먹자는 제안을 거절하고 실험실 책상에 엎드려 쪽잠을 잤다. 속이 너무 아프기도 했다. 나중엔 불편해서 피험자가 앉는 의자에서 웅크려 잠을 청했다. 잠을 깬 후에도 남은 시간이 파워 우주 공강과 같았기 때문에 시간은 지루하게 흘러갔다. 마침내 3시 30분이 되었을 때 그가 왔고 우리는 다시 실험 준비를 시작했다. 컨디션이 너무 좋지 않아서 기운이 없는 채로 앉아 있자니 N이 괜히 눈치를 보는 것 같았다. 통증 때문에 배에 손을 가져다대니 그가 장난으로 퓨슝 하면서 기운을 불어 넣어줬다. 덕분에 웃고 기운을 조금 차릴 수 있었다. 이번 피험자에게 실험 준비를 할 땐 왠지 모르게 손이 떨려서 창피한 느낌이 들었다. 전문가처럼 보이고 싶은데. 그래도 이때가지 만난 피험자들은 모두 이미 실험참여 베테랑(?)이라서 편하다. 어떤 피험자는 내가 잊고 넘어가는 부분에 대해서 일러주기도 했다. 그러면 나는 머쓱해하며 고맙다고 말한다. N은 그걸 보고 말했다. "내가 말했지, 제일 좋아하는 피험자라고." 

 

 다음주에도 실험이 있을 것이다. 나는 N의 실험을 돕기로 했다. 밖은 이미 어두컴컴해져 있었다. 한참을 걷고 있는데 왓츠앱이 왔다. 블루투스 이어폰 한짝의 사진이었다. 깜빡하고 실험실에 놔두고 왔네 어쩐지. 다음주에 가지러 가야겠다고 답장했다. 왠지 기운이 나질 않았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괜히 하늘을 바라봤는데 별들이 무수히 떠 있었다. 마트에 들러 홍합과 연어와 와인을 샀다. 홍합탕을 끓이고 연어를 회로 썰었다. 기분이 이상해서 슬픈 것들만 찾아봤다. 독일에 처음 도착했을 때의 계절이라 그런가 겨울이 되면 우울해진다. 내 곁에 있던 소중한 사람들과 사랑했던 사람들의 생각이 많이 났다. 엄마도 보고싶다. 2년을 떨어져 있으니 그 마음이 극에 달했다. 두시간을 내리 울고 잠에 들었다. 겨우 네시간을 자고 일어났더니 눈이 퉁퉁 부어 있었다. 일년에 한번 이렇게 울까 말까한데 얼굴을 보고 있자니 피식 웃음이 났다. 뭐가 그렇게 슬프냐. 요즘은 생각을 깊게 안하려고 자제를 많이 하고 있다. 집 근처 높은 굴뚝을 보고 있는데 몇달 전 높은 곳만 보고 있으면 자꾸 떨어지고 싶은 생각이 들던 내 자신의 모습이 오버랩 됐다. 일단은 어떻게든 아등바등 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