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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그때 쓰는 일기

2년 동안 살았던 곳을 떠난다는 것은

 기숙사에 살고 있기 때문에 떠나기 전에 Studentenwerk 직원에게 직접 검사를 받고 키를 돌려줘야 했다. 그런데 떠나는 날, 기차 시간이 아슬아슬할 것 같아서 혹시 더 빠른 시간에 다시 Auszugstermin을 잡을 수 있겠냐고 물었다. 방이 깨끗하다면 15분 안에 모두 끝나겠지만, 만약 그 상황이 stressful 하다면 키를 방에 두고 가도 좋아,라고 메일 답장이 왔다. 11시 반 기차를 타야 하고, 역까지 가려면 최소 10시 50분에 나오는 게 좋을 것이다. 큰 캐리어를 두 개나 끌고 가야 하니까. 그러니 10시 반 테어민은 무리일 것 같았다. 그럼 우편함과 방 열쇠를 책상 위에 놓고 갈게 하고 회신했더니 또 답장이 이렇게 왔다. 

 

 

 

 

 여기에 있는 동안 좋은 시간을 가졌길 바란다는 저 짤막한 문구를 보는데 왜 마음이 이상하던지. 이 도시에서 살았던 기억이 좋은 기억뿐이라면 얼마나 좋았겠어, 정말 좋았을 것 같아. 처음 이 동네에 와서 겪었던 우여곡절이 모두 생각났다. 하염없이 불친절한 동네에 익숙해져야 했을 때, 우울감이 문득 찾아왔을 때, 프로젝트를 fail 했을 때... 그 모든 것들에 무덤덤해지기까지 얼마나 많은 일들이 있었는지 모르겠다. 내 기억 속 이 동네는 늘 궂은 날씨, 길고 긴 어두컴컴한 밤이었다.

 

 1년 정도가 지나고 나서야 이 동네에도 햇빛이 든다는 사실을 깨닫게 됐다. 어쩌면 나에게도 열린 마음이 필요했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그냥 불친절함을 디폴트로 여기는 면역이 생겼다던가. 

 

 

 

 

 플랫메이트들에게도 미리 귀띔은 해뒀지만, 오늘에서야 이사하는 날짜를 알려줄 수 있었다. 저날 애들한테 비빔밥을 해줘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또 다른 요리는 뭘 해야 할까.

 

 

+ 지금 떠올랐는데 나의 이십대는 2년 주기로 분할되어 여기저기 옮겨 다녀야 했다. 심지어는 대학도 2년 다니다가 편입해서 또 다른 곳에서의 2년을 보냈다. 그 동안 주거지는 수시로 바뀌었다. 한 곳에서 2년이 최대구나. 서른이 되면 어디엔가 정착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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