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처음 본 중화권 영화는 초등학생일 때 다닌 합기도장에서 몇 번이고 틀어줬던 <소림 축구>였다. 어릴 적에도 첨밀밀이나 중경삼림, 화양연화 등 명작이라는 영화 제목들을 익히 들어왔지만, 소림 축구로 인해 이미 내 머릿속의 중화권 영화는 '우스꽝스러운 오버 액션'의 이미지로 굳어진 후였다.
물론 소림 축구만이 다는 아니었다. 대학을 다닐 때 영화 관련 교양 수업을 들은 적이 있었는데, 그때 교수님께서 <해피투게더>라는 영화를 감상하라는 과제를 내주셨었다. 나는 그때 처음 장국영이란 배우가 영상 속에서 살아 움직이는 것을 봤다.
내가 초등학생이던 시절, 그는 만우절에 세상을 떴다. 갑작스러운 장국영의 사망 소식은 타국인 한국에까지 흘러들어와 그의 팬들을 깊은 슬픔에 잠기게 했다. 만우절 당일이었기 때문에 곧장 믿었던 사람은 없었다. 그를 따라 자살 소동을 벌인 팬들도 있다는 사실도 나중에 전해 들었다. 하지만 나는 당시에 어떤 매체로도 장국영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감흥이 없었다.
사실 해피투게더를 본 뒤에도 그 배우의 인상에 대한 큰 차이는 없었다. 이상하게도 과제로 주어진 영화는 집중해서 보기가 힘들었기 때문이다. 띄엄띄엄 본 그 영화의 분위기는 좋았지만 크게 남는 것이 없었다. 그처럼 장국영의 연기도 흘러가듯이 봤다. 그의 인생작이라고 일컬어지는 <패왕별희> 또한 경극이라는 생소한 소재를 이용한 데다가, 너무 옛날 영화라 딱히 볼 일이 없을 거라 생각했다.
그가 떠나고 17년이 지나서야 그의 연기에 뒤늦게 감동을 받게 되었다. 누군가 그랬다. 이미 세상을 떠난 사람을 사랑하게 되는 것만큼 슬픈 일은 없다고.
어느날 우연히 지무비라는 유튜버의 영화 소개를 보고 패왕별희를 봐야겠다는 결심을 했다. 그러고 보면 새삼 유튜브의 힘이 저절로 느껴진다. 사람들의 고정관념을 깨는 설득력이 있는 영상이란 얼마나 대단한가.
장국영이 맡은 역, 영화 속의 뎨이를 보고 있으면 마음 아픈 장면이 많다. 뎨이의 삶은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과 시대에 따라 판단되는 그의 예술로 이뤄져 있었다. 어렸을 때부터 그의 인생은 고달팠고 채워지지 않는 허기와도 같았다. 원대인 앞에서 눈물 흘리던 모습, 관객들의 야유 속에서도 꿋꿋이 경극을 이어나가던 그의 모습이 한동안 맴돌았다. 일본군 앞에서 공연을 했다는 사실을 숨기지 않으려 하던 그때, 극 중 대사가 없었더라도 뎨이의 눈빛은 모든 걸 대변했을 것이다. 어떤 영화를 통틀어도 그렇게 아픈 눈빛은 본 적이 없고 볼 수도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 면에서는 처연함과 동시에 아름답기도 했다.
감정선을 이끌어가는 뎨이 역을 완벽히 소화하는 배우는 장국영 외에 누가 대신할 수 있을지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다.
그의 완벽한 연기와 더불어 이 영화가 정말 대단한 점은 날것의 역사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는 것이다. 그저 개인의 이야기나 드라마가 아닌, 시대극인 셈이다. 천카이거 감독은 셀 수 없이 많은 격동의 세대가 어떻게 지나갔는지를 시간의 흐름에 맡겨 과장이나 축소 없이 보여준다. 지금의 중국에서는 만들어질 수 없는 역작이라는 의견들이 많다.
어느 시대에는 신성시되던 가치관이 또 다른 미래의 시대에서는 천하게 여겨질 수 있다. 인간이란 얼마나 나약한지 그저 몇 사람의 결정에 따른 변화에 모두 휩쓸린다. 오랜 시간 지켜오던 그들의 사고방식을 완전히 철거하기도 한다. 권력 다툼,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시대 변화 그 사이에서 고통받는 건 강한 신념을 가진 자뿐이다. 그것이, 인간의 신념이 가장 고귀한 가치에 자리하고 있다 생각하는 나를 슬프게 만들었다.
지금보다 더 어릴 때 보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20대 초반에 이 영화를 봤으면 아마 지금의 감정을 느끼지 못했을지도 모르겠다. 나중에 나이가 더 들어 보는 패왕별희는 또 다르게 다가올까? 이렇게 드라마 속에 중국의 현대사를 고스란히 녹여낸 영화를 또 찾을 수 있을까?
내 인생 영화는 패왕별희를 보기 전과 후로 나뉜다. 이 영화는 어디 하나 빈 곳 없이 서사를 채워놨다.
2017년에 패왕별희가 재개봉했고, 장국영의 추모 14주기가 돌아오는 올해 2020년 4월 1일에 확장판을 재개봉한다. 좋은 화질로 보는 게 내 소원인데 나는 꼭 이럴 때 한국에 없지...
+) 영화를 본 것은 시간이 남아돌던 작년 12월 말이었는데, 결코 쉽게 리뷰를 써내려갈 수가 없어서 몇번이고 썼다 지우고 썼다 날려버리기 일쑤였다. 그래서 마음을 비우고 그냥 가볍게나마 글을 써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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