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출근을 안 하니까 할 일이 빈둥대거나, 영화를 보는 것밖에 없다. 역시 재택근무는 나에겐 맞지 않는 옷이었어. 이 영화를 추천하는 사람들이 많길래 언젠간 봐야지 하고 벼르고 있었다.
줄거리도 제대로 들은 적이 없어서 장르가 호러인지도 모르고 불을 다 끈 밤에 봤다. 사실 미드소마는 호러 영화라고 분류하기도 애매하다. 고어한 장면들이 나오기는 하나 일반적인 호러 영화처럼 영적인 존재의 출현이라던가 깜짝 놀랄만한 장면들도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물론 영화의 분위기 상 내내 긴장하며 볼 수밖에 없었다. 공포 영화라면 쥐약인 나도 너끈히 볼 수 있었던 (그러나 정신이 잠깐 피폐해지는 느낌을 받은) 영화, 미드소마를 소개한다.
영화는 눈 내리는 겨울의 배경으로 시작된다. 첫 장면에 등장하는 대니라는 여주인공은 불안정해 보인다. 본인의 여동생으로부터 불길한 문자를 받았기 때문이다. 그녀는 알 수 없는 공포에 사로잡혀 남자 친구와 통화한 후 또 다른 친구에게도 전화를 건다. 누군가에게 꼭 나의 불안감을 알아달라는 듯. 하지만 그녀도 이미 직감으로는 알고 있다. 너무 자신의 가족 일로 끌어들여 질린 게 아닐까 친구에게 토로한다. 통화를 끝낸 대니의 남자 친구, 크리스티안은 지쳐 보인다. 그의 친구들도 대니가 지나치게 의지하는 것 같다며 헤어질 것을 종용한다. 그들의 관계는 위태로워 보인다. 하지만 그 권태는 대니의 여동생이 저지른 끔찍한 사건으로 인해 순식간에 다른 방향으로, 그러나 여전히 같은 결로 전환된다.
대니가 가족을 잃은 후에도 계절은 바뀌고 연인의 관계는 여전히 미지근하다. 크리스티안은 그녀를 파티에 데려가고 싶지 않아 하지만 대니는 그가 가는 곳이면 어디든 가야 하는 양 따라다니려고 한다. 심지어 논문 조사를 위해 스웨덴을 가려하는 크리스티안과 그의 친구들 여행에도 동참하게 된다. 친구들은 스웨덴 여행에 따라가겠다는 대니의 말을 듣고 난색을 표하지만, 그들 중 하나인 펠레는 그녀를 환영한다. "너한테도 그곳에 가는 게 정말 좋을 거야"
그렇게 일행은 스웨덴에 도착해 차로 한참 달려 나오는 헬싱글란드에 도착한 후, 또 한참 걸어 호르가라는 마을에 다다른다. 들꽃들이 피어있고 지천이 푸릇푸릇한, 평온한 마을 호르가. 그들은 흰색 린넨 옷을 입고 꽃관을 쓴 마을 사람들에게서 환영과 융숭한 대접을 받는다. 이곳에서는 90년에 한 번, 9일씩 미드소마(Midsommar), 즉 하지제가 열린다. 백야 현상 때문에 해가 지지 않는 이곳에서 대니와 그의 일행들은 마을 사람들이 제공해주는 음식과 음료를 먹고 마시며 그 분위기에 점차 적응하게 된다.
하지만 축제의 이틀 째 되던 날, 일행들은 이 평화로운 장소에서 의식의 한 부분인 죽음을 목격하게 된다. 이미 신경쇠약을 겪고 있던 대니는 큰 충격에 빠지고 이곳을 떠나겠다 말하지만, 펠레가 가족 이야기를 꺼내며 어떻게든 그녀를 진정시킨다. 영화 상에서 아무리 시간이 흐르고 여러 가지 사건들이 벌어져도 호르가는 여름의 눈부신 낮과 평화롭고 따뜻한 배경을 유지한다.
호르가 사람들은 미드소마 폴 또는 메이폴이라고 불리는 장대를 중간에 두고 춤을 춘다. Hälsingehambon이라고 불리는 스웨덴의 전통 춤으로, 원형으로 빙빙 돌며 음악에 맞춰 춤을 추다가 실수로 쓰러지는 사람들은 제명되고, 끝까지 살아남는 한 사람만이 5월의 여왕이 될 수 있다. 춤을 추는 대니는 경쾌해 보이지만 그녀를 보고 있지 않는 크리스티안을 바라볼 때는 표정이 굳어진다. 이 장면에서 춤을 통해 마을 사람들과의 유대감을 쌓는 모습을 보임과 동시에 크리스티안과 멀어지는 관계를 표현했다고 생각한다. 사람들과 똑같은 흰색 옷을 입고 이 대열에 합류했던 대니는 결국 최후의 일인이 되어 여왕으로 승격한다. 사람들은 얼떨결에 메이퀸이 된 대니에게 조건 없는 지지와 사랑을 보여준다.
어떤 사건으로 인해 대니가 고통스러워 울부짖을 때에도, 마을 사람들은 곁에서 함께 소리를 지르며 울어준다. 그녀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고 호흡을 맞추며 우리도 너의 고통을 고스란히 느끼고 있다는 듯이 처절하게 운다. 대니는 이질적임과 동시에 치유받는다는 느낌을 함께 느꼈을 것이다.
넷째 날 호르가에서는 신에게 아홉의 제물을 바치는 의식을 치른다. 호르가에서 네 명, 새로운 피 네 명 그리고 여왕이 선택하는 한 명. 사람들은 죽음이 곧 순환이라고 믿는다. 그들은 이미 새로운 피를 준비해두었고 나머지 선택은 여왕인 대니에게 맡긴다. 대니는 새로운 피, 즉 외부인과 마을 사람 둘 중에서 한 명을 선택해야 한다.
제물이 선택된 뒤 모든 것은 불타고, 그것을 보며 구역질을 하던 대니가 마침내 미소를 띠는 것을 마지막으로 영화가 끝난다.
정말 이상하고 기괴한 영화라고 생각하면서도 미드소마를 이틀에 걸쳐 두 번이나 봤다. 처음엔 이게 뭔가 싶다가도 어쩔 수 없는 그런 미묘한 끌어당김이 있었다. 정확히 어디에서 본 건지는 모르겠지만, "정상인에게는 정신적으로 트라우마를 주는 영화, 비정상인에게는 힐링을 주는 영화"라는 글귀가 기억이 나는데 정말 영화를 꿰뚫는 표현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비정상인이라는 범주가 너무 크고 사려 깊은 표현은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깊은 슬픔을 겪었거나 또는 충격적인 사건으로 인해 우울증, 신경쇠약에 걸리는 사람들이 있다. 일반적으로 개인이 감당하기 힘든 것이기 때문에 그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사람들의 이해와 지지이다. 정말로 개인적인 견해지만, 우울감과 슬픔은 정신과적인 상담과 약 이외에 객관적인 방법이 없다. 스스로 가끔 표출하면서 그것이 쌓이지 않게 해야 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러한 상처가 벌어진 틈을 노리는 것들이 있다. 그것이 개인이든 집단이든 한번 교묘한 방법으로 다가가면 약해질 대로 약해진 사람은 그들을 쉽게 믿게 된다. 대니 또한 가족을 잃은 슬픔이 있고, 심리학을 전공하는 학생이기 때문에 누구보다 더 자기 방어가 강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한번 허물어지게 되면 걷잡을 수 없게 된다. 대니는 이미 자신을 조건 없이 포용해주는 마을 사람들과 한 몸이 된 셈이다.
나는 인간의 자유의지를 조종하려는 것을 가장 경계한다. 누군가에게 불편한 발언일 수 있지만, 내겐 종교가 그렇고 정치가 그렇다. 개인과의 상호작용에서는 스스로 컨트롤할 수 있는 범주가 있다. 하지만 그 수가 늘어나고 집단이 되면 인간은 자신을 잃을 수도 있게 된다. 거대한 물결에서 반대 방향으로 거슬러 올라가려는 피라미의 상황과 마찬가지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다수의 주도는 훨씬 강력하다. 또한 인간을 잘 아는, 포섭해야 하는 집단이야말로 철저하고 세밀하기 마련이다. 그 무언가에 빠지게 되면 사람들은 인간 윤리는 고려할 새 없이 그 집단의 이익만을 최우선으로 한다. 그것이 또다시 개인을 집단 내 깊숙이 묻고 일체화시킨다. 그것이 순환된다.
미드소마 비하인드
1. 미드소마의 감독인 아리 애스터는 본인이 겪었던 이별을 바탕으로 이 영화를 제작했다고 한다
2. 대부분의 촬영은 헝가리에서 이뤄졌지만, Hårga라는 지명은 스웨덴에 실제로 존재한다. 미드소마 또한 스웨덴에서 실제로 열리는 축제다. (하지만 절대 살육의 축제는 아니다...)
3. 영화에 나오는 극단적인 희생 의식은 민담과 신화에서 발췌한 일부이다. 학자들은 Ättestupa라고 불리는 이 의식은 수 세기 전에 진행되었을 거라고 추정한다.
4. 애스터는 정치적인 면을 크게 부각하려 하지는 않겠다 언급했지만, 미드소마의 프로덕션 디자이너인 헨리크 스벤손은 스웨덴에서 부상하는 극우 극단주의와 최근 성공을 거둔 백인 민족주의적 스웨덴 민주당에 대한 설명으로 그 관계를 떼어놓지 않았다(https://www.thrillist.com/entertainment/nation/midsommar-is-harga-real). 이것은 영화에서 그려지는 호르가에서의 인종 동질성의 고집을 설명한다.
5. 여주인공 플로렌스 퓨가 올린 비하인드 컷. 매우 단란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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