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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리뷰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서로만이 알아챌 수 있는 선명한 사랑의 눈짓 (Portrait of a Lady on Fire, 2020)

 오랜만에 가슴이 떨리는 영화를 보았다. 

 

 

 

 구글 플레이에 이 영화가 업로드된 건 최근의 일이다. 물론 독일어 버전은 예전부터 존재했지만, 한국어 버전은 찾을 수가 없었다. 위시리스트에 넣어두고 기다리기를 몇 달, 드디어 업데이트가 되었다는 알림이 왔다. 부가영상은 30분 가량의 페인팅 과정 풀 영상이다. 

 

 

 

 바닷가에서의 산책으로 시작되는 이야기

 

imdb picture

 

 화가인 마리안느는 엘로이즈라는 여성의 초상화 제안을 맡는다. 마리안느는 엘로이즈 어머니의 부탁으로 본인이 초상화를 그리러 왔다는 목적을 숨기고, 엘로이즈의 산책 친구로서 동행하게 된다. 그녀는 언니가 절벽에서 떨어져 죽은 이후로 수도원에 머물다가 집으로 돌아왔고, 얼굴도 모르지만 밀라노에 살고 있는 남자와 혼약을 한 상태였다. 마리안느는 엘로이즈와 산책을 하는 동안 그녀의 얼굴을 계속해서 몰래 관찰하고, 뇌리에 담아놓은 인상을 모델이 없는 화폭에 그려낸다. 

 마침내 초상화를 완성한 마리안느는 엘로이즈에게 그동안의 사실을 말하고 작품을 보여준다. 엘로이즈는 그녀의 얼굴을 한 초상화를 바라보다 이 그림에는 생명력과 존재감이 없다고 말한다. 자신의 작품이 부정당했다고 느낀 마리안느는 초상화의 얼굴 부분을 짓뭉개 망쳐버리게 된다. 엉망이 된 완성작을 본 엘로이즈의 어머니는 마리안느를 쫓아내려 하지만, 엘로이즈가 직접 모델을 자처하면서 5일간 만회의 시간이 주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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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등한 위치라는 명백한 주장

 

 마리안느는 그림을 위해 포즈를 취한 엘로이즈에게 그녀의 습관적인 몸짓에 대해 이야기하다 사과한다. 자신이었어도 관찰당하는 그 위치가 싫었을 거라고. 화가가 어떤 객체를 그리기 위해서는 노골적으로 바라보는 시선이 있어야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엘로이즈는 '우리는 똑같은 위치에 있다'고 단호하게 맞받아친다. 당신이 나를 바라보는 동안 나도 당신을 바라보고 있다. 이는 영화를 관통하는 하나의 주제로써 반복된다. 몰래 그려지는 그림이 아닌, 엘로이즈는 모델로서 그녀 자신만의 표정으로 자세를 취한다. 

 

 그들은 함께 그림을 그리고, 하녀인 소피의 임신 중절을 돕고, 카드 게임을 하고, 책을 읽으면서 시간을 보낸다. 이 셋은 지위를 의식하지 않고 함께 요리를 하고 와인을 마신다. 다 같이 오르페우스 신화 이야기를 읽다가 소피가 반문한다. 그러면 안된다는 걸 알면서도 왜 오르페우스는 뒤를 돌아봤나? 사랑에 미쳐 어쩔 수가 없었을 것이다, 시인의 선택을 한 것이다 등의 추측이 나오고, 엘로이즈는 신화에는 쓰여있지 않은 답을 내놓는다. 

 

출처: https://www.imdb.com/title/tt8613070/mediaviewer/rm2753598465

 

 에우리디케가 돌아보라고 말했을 수도 있다고, 수천 년간 그려져 온 여성의 수동성에 반론한다. 그 후 마리안느는 이상한 낌새를 느끼고 돌아볼 때마다 엘로이즈의 환영을 본다. 끝을 알면서도 뒤돌아봐야하는 마리안느에게 살아있는 환영인 엘로이즈가 다시 말한다. "돌아보라"고. 

 


 

 영화를 보는 도중에 <캐롤> 생각이 났다. 캐롤이 사운드트랙과 촬영의 감도로 극의 서정성을 극대화시켰다면, 이 영화는 약간은 건조하다 느낄 수 있을 정도의 담백한 구성으로 사랑을 표현했다. 반면 비슷하다고 생각했던 점은, 여전히 난 주인공들이 느끼는 사랑의 진행을 눈치채지 못한다는 것이다. 내가 무던한 건가. 물론 사랑이 얼마나 빠르게 생겨나든 그 시작점이 꼭 중요한 건 아니지만 극 중 분위기를 따라가다가 가끔 몰입이 흐트러지기도 한다는 게 아쉽다.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에서는 직관적으로 여성들의 연대를 보여준다. 남성들의 역할은 그저 뱃사공, 정략결혼의 상대자, 또는 그림을 감상하는 신사 정도로만 나타난다. 아이러니하게도 영화는 여성들의 존재감이 지워지던 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정략결혼을 해야 하고, 본인의 이름이 아닌 아버지의 이름으로 출품해야 하는 시대에서 그들은 한정적인 시간이나마 함께 웃고 눈물 흘린다. 로맨스 외에도 담담하게 여성의 삶을 그려낸 이 영화는 칸 영화제 황금 종려상 후보에 올랐고, 각본상을 수상했다.   

 

 

 

 세자르 시상식에 관하여 

 

 지난 달이었던 2월 28일, 프랑스 최대 축제라고 일컬어지는 세자르 영화제가 열렸다. 이 영화제에서 로만 폴란스키가 <장교와 스파이>(J'accuse)로 감독상을 수상했다. 많이 알려져 있다시피, 로만 폴란스키는 미성년자를 대상으로 한 성범죄 전력이 있는 감독으로, 미국에서 10대를 성폭행한 사실을 시인한 후 프랑스로 망명해 도피 생활을 이어가고 있다.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에서 엘로이즈 역을 맡은 아델 에넬이 감독상 발표 직후 박차고 일어나 시상식장을 떠나면서 한동안 이슈가 됐었다. 이 퇴장 건에 대해 유명 캐스팅 디렉터(올리비에 카르본)와 영화제 관련 권위자들이 비난을 했으며, 아델 에넬의 커리어가 불투명해질 것이란 논조의 글을 올리기도 했다. 아직도 프랑스에 예술과 윤리를 분리해 보는 영화계 예술인이 많다는 사실이 경악스러우며, 수많은 성범죄 전력이 있는 감독에게 최고상을 준 세자르 영화제가 앞으로도 권위있는 영화제로 계속 홍보될 수 있을지 의문이 든다.